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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천년고찰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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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

773년(신라 제 36대 혜공왕 9년) 법조(法照)스님께서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를 순례하다가 큰 봉황새가 현재의 무봉사 자리에 날아와 앉으므로, 상서로운 성지라 생각하고 창건하였다. 

고려의 고승 범률국사가 이 절에서 하안거를 하면서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기 때문에 절 이름을 무봉사로 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삼문동 지역에서 봉황이 알을 낳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밤나무를 심어 가려 주었으며, 무봉사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종소리를 울려 봉황을 날게 하였다고 한다.

1359년(고려 제 31대 공민왕 8년) 영남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무봉암이라 하였던 이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 혜징(慧澄)이 중건하고, 1628년(인조 6) 경의(敬儀)가 중창하였다. 1899년(광무 3) 경봉(慶蓬)이 중건하고, 1942년에 중수,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 삼성각·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보물493호)

무봉사 석조 여래 좌상(舞鳳寺 石造 如來 坐像 보물 제 493호)

773년(혜공왕 9)에 법조스님이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했다는 무봉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97cm의 앉아 있는 불상이다. 

원래 불상 뒤의 광배와 앉는 대좌가 없는 채로 영남사 터에 계시던 것을 근처에서 출토된 광배와 대좌를 맞추어 무봉사에 모셨다.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면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이다.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에 알맞은 가슴이다. 목에는 세 줄의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양 어깨에 걸친 법의(法衣)는 두텁게 표현되었다. 

부처님의 빛을 나타내는 광배(光背)는 두 줄의 볼록한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구분되었고 안에는 넝쿨과 연꽃을, 밖에는 불꽃을 아름답게 새겼다. 

다시 정면에는 다섯 분의 작은 부처님을 새겼고, 뒷면에는 드물게 약사여래부처님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것은 경주 남산의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136호)에서 보이는 정도로 드문 예이다. 

한 개로 된 사각형의 대좌(臺座)에는 두꺼운 연꽃무늬가 단순 명료하게 새겨졌다. 

불상은 단정하고 양감있게 표현되었으면서도 법의의 주름이 간략해지고 광배의 꾸밈이 화려하고 복잡해진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 후기에 조성(造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여기 불상은 희미하지만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 수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생각되며 마모가 너무 심해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현존하는 무봉사 본존불인 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후기 보물 493호)보다 먼저 무봉사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추정하건데 그 후 옛 영남사(지금 영남루)가 화재로 소실되자 영남사의 부처님을 무봉사로 이운해 오면서 야외로 옮겨 관리가 허술해지고 조선시대를 거치며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훼불 할 목적으로 부처님 코를 잘라 방편을 쓰면 자손이 생긴다는 소문을 퍼트려 지금 여기 불상도 얼굴부분이 특히 심하게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여기 부처님을 통해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이후로 방치되고 땅에 매몰되어오자 근대에 경내지에 출토되었다고 하니 중생들의 무지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파괴됨이 안타까울 뿐이며 최초 불상을 조성할 때의 옛 스님들과 신심단월의 정성을 생각하고 문화유산을 작은 것이라도 잘 보존해야할 후인들의 책임감을 느끼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모시게 되었으니 인연있는 모든 분들은 여기 약사여래불에 참배하여 마모되고 보잘것없는 형상을 보지 말고 그 이면에 있는 중생의 병과 괴로움을 없애주시려 서원하신 부처님의 위대한 이타정신을 배우고 문화유산을 아끼는 마음 함양하길 기원합니다.